콩코르드 다리, 역사로 가득한 다리
콩코르드 다리: 위치
콩코르드 다리는 센강을 가로질러 튈르리 연못(콩코르드 광장)과 오르세 연못(국민의회 맞은편, 오르세 미술관 인근)을 잇습니다. 콩코르드 광장과 로얄 가(通り)를 따라 좌안의 국민의회에서 우안의 마들렌 성당까지를 연결하는 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콩코르드 다리의 자동차 통행량은 파리에서 가장 혼잡한 다리 중 하나입니다.
역사와 얽힌 콩코르드 다리
콩코르드 다리의 건설 계획은 17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에는 나룻배를 대체하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계획은 혁명 발발 2년 전인 1787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이 다리는 혁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건설되어 1791년 바스티유 감옥 해체로 나온 돌로 완성된 만큼,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다리는 역사적 이유로 ‘루이 16세 다리’, ‘혁명 다리’, ‘콩코르드 다리’로 불리다가 1814년 왕정복고기에 다시 ‘루이 16세 다리’로 불렸고, 1830년 이후로 ‘콩코르드 다리’라는 이름이 정착되었습니다.
1810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1제국campaign에서 전사한 8명의 장군을 기리기 위해 이 다리에 동상을 설치했습니다.
1814년 왕정복고기에는 이 장군들의 동상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12개의 기념비적 조각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조각상은 4명의 위대한 장관, 4명의 병사, 4명의 해군 장교를 묘사한 것이었는데, 다리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루이 필리프 1세에 의해 베르사유로 옮겨졌습니다. 현재 이 조각상은 생시르 코엣퀴당(해군학교), 브레스트 해군학교, 로니쉬르센, 생오메르, 리슐리외, 투르빌쉬르시엔에 분산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1896년 10월,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콩코르드 다리를 지나 러시아 대사관으로 향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 순간: 1934년 2월 6일 위기 당시, 콩코르드 다리와 그 주변은 좌우익 시위대 간의 격렬한 충돌 현장이 되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한 경제 위기, 파시즘의 대두, 스카비스키 사건 등 제3공화국 정치 스캔들 속에서 발생한 이 충돌로 공식 사망자 14명, 부상자 657명이 발생했습니다.
콩코르드 다리 오르세 연못 쪽에는 국민의회 인근에 역사 plaque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변화하는 구조의 다리
18세기 말 건설되어 1789년 혁명기에 완공된 콩코르드 다리는 당시 폭 8.75m의 차도와 폭 3m의 보도 2개가 있었습니다. 1925년 알렉산더 3세 다리에서 통행량이 상당 부분 이관되면서 폭이 13.5m로 확장되었고, 보도는 대부분 사라졌으며 상류쪽에 보행자 전용 다리가 설치되었습니다.
콩코르드 다리 확장 최종 입찰은 1929년 3월 1일에 승인되었고, 공사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최종 폭은 35m에 이르렀으며, 차도는 21m(알렉산더 3세 다리와 동일), 보도는 7m씩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건축가 드발과 말레는 원형인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보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마지막 보수 공사는 198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콩코르드 다리의 기술적 특성
아치형 석조 및 철근 콘크리트 다리, 길이 153m, 폭 34m
이 다리는 1975년 6월 12일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